한천희 113

쌀(부제 : 아버지)

당신 혼자 있을 땐 늘 포대 속에만 있었지 누군가 꺼내주기만을 기다리며 가끔 혼자 있을 때라야 당신이 생각나 포대 속에서 당신을 꺼내 준다 바쁘다는 것이 시간이 없다는 것이 나도 혼자가 되어서야 핑계라는 걸 안다 씻기지 않아도 손으로 문지르지 않아도 물에 담가 주기만 해도 몸에서 하얀 외로움들이 떠내려간다 당신은 그래도 고맙다고 뜨거운 입김 토해가며 나를 위해 하얗게 빛나는 눈꽃이 된다 #시 #시집 #시인 #한천희 #쌀 #아버지 #쌀뜨물 #전기밥솥 #취사 #뜸들이기 #증기배출 #밥

카테고리 없음 2024.06.23

혼자 사는 연습

어느 날. 그것도 혼자서 양푼에 밥을 비벼 입 앙다물고 한 입 먹으면 갑자기 옆에 누가 있었으면 하는 눈망울이 미워 더 크게 한 입 떠먹인다 혼자 먹어 본 적이 없어서일까 혼자 설거지를 하면 누군가 자꾸 물이 세다며 수도꼭지를 잠그려고 한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숟가락 하나 밥그릇은 양푼 하나 국그릇도 달랑 하나 먹을 땐 혼자였는데 설거지할 때는 여럿이 모여 부딪힌다 그 옛날 당신과 나처럼 #일상 #시 #시집 #시인 #한천희 #이별 #혼자살기 #연습 #양푼비빔밥

카테고리 없음 2024.06.19

두루마리 롤화장지를 걸며

돌돌 말린 두루마리 롤화장지를 건다 새것.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새로 걸어 놓은 두루마리 롤화장지를 바라보며 '새로 바꿨으니 양이 많아서 오래 사용하겠지'라고 새로 시작하는 기분 좋은 마음에 흠뻑 빠져본다 처음엔 내 인생도 그렇게 시작했지 기분 좋은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해 놓고 시간이 많이 남은 줄 알고 계획도 없이 아무렇게나 휙휙 잡아당겨 쓰고 있었지 쓸데없이 길게 잡아당겨 사용하기도 하고 사용하다 남아도 아무렇지 않은 듯 버리고 몇 겹이면 될 걸 수십 겹씩 사용하기도 하고, 갑자기 얼마 남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지더라 수십 겹 사용했던 곳에도 몇 겹만 사용하고 사용하다 남은 조각도 버리지 않고 놔뒀다가 다시 사용하고 한 번 더 생각하고 아껴서 사용하게 되더라 무한할 줄 알았던 인생길 롤...

카테고리 없음 2024.06.13

결혼하지 말 걸

너를 선택한 건 나의 욕심이었나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는데. 왜 부질없이 네 인생에 관여했을까 너는 지금 어느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있니 내가 보이지 않는 공간 속으로, 혹여 우리 다시 마주친다면 그냥 설렘으로만 지나치자 너는 열차 안으로 나는 역사 밖으로 지하철을 따라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환영처럼 너는 고객 나는 직원으로 번호표를 통해 대면하기 직전까지의 기다림이 주는 잠깐의 떨림으로만 기억하자 먼 옛날 너는 공주로 나는 호위무사로 애틋하게 서로의 안위만을 걱정해 준 것처럼, #시 #시집 #시인 #한천희 #결혼 #이혼 #연습

카테고리 없음 2024.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