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483

그녀

그녀 뒤를 따라서 걸어가 보았습니다 누가 보면 스토커인 줄 알겠어요 우연히 걸어가는 방향이 같아 어쩔 수 없이 제가 뒤에서 가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뒤따라가는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아무튼 앞지를 수도 있을지는 몰랐지만 계속 그녀를 따라서 아니 그녀 뒤에서 걸어갔습니다 뒤에서 따라갈 때까지는 동화 속 한 장면 같았습니다 거의 다 따라왔는데 그녀가 흡연장소로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동화 속에는 이런 얘기가 없었는데 어쨌든 담배를 피우고 그것도 발로 비벼서 끄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뒤따라 온 걸 안 것일까요 동화 속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3.04.28

동전 소리

딸그락 딸그락 어떤 영감이 내 앞에서 커다란 비닐봉다리에 빈 캔들을 가득 담아 지나간다 내 추측으로는 신도림역에서 밤을 쫓던 사람들이 마신 거리의 흔적들을 새벽을 틈 타 수거하여 오는 듯하다 어라 저기 앞에서도 떨그럭 떨그럭 빈 캔들을 모아서 들고 오는 영감이 있다 혹시 저분은 영등포역에서 수거해서 오는 것일까 나를 사이에 두고 두 분이 할끗 마주 보며 스쳐가는 차마 마음 약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묘한 광경이 연출된다 두 분은 서로 무슨 생각을 할까 어디서 수집했는지 궁금해할까! 자신의 생계에 경쟁자라 생각하고 미워할까? 오늘따라 내 발걸음이 가벼이 나아가지 못한다 앞서가는 영감의 표정을 보랴 지나가는 영감의 뒷모습을 보랴 뒤틀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찌그러진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내 뒤를 따라오..

카테고리 없음 2023.04.27

연극은 시작되고

정말 될 줄 알고 사는 건가 1등이 길게 늘어선 줄이 마치 공연 티켓을 구매하려고 줄을 서있는 듯하다 주연배우는 숫자 45개 조연은 로또 판매점 주인 불특정 다수의 서민은 엑스트라 몇백만 분의 1이라는 숫자에 희망을 걸어본다 1등만 바라다본다 낙첨이 되는 수많은 엑스트라들은 보이지 않는다 손에는 만 원권 지폐 한 장 머리엔 6개의 숫자 가슴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공연시간만을 기다린다

카테고리 없음 2023.04.23